glass

Lullaby

gaebeee 2018. 12. 24. 23:48


*반복재생 해주시면 감사합니다! 




Lullaby

 

 


", 아냐 아냐. 그것보다 눈썹이 조금 더 짙은데."

 

"... 유라, 지금 세 번째 다시 그리고 있는 건 알고 있지."

 

", 진짜 믿어봐. 이것보다 조금 더 걔 인상 강아지 같다니까? 객관적으로 그래."

 

 

목탄이 손톱까지 파고들어 까매진 손으로 랜스가 컵을 쥐었다. 식은 홍차에 설탕 알갱이가 까슬하게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았다.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차를 마신 뒤, 다시 우둘투둘한 캔버스로 손을 끌어 세 번째 같은 셔츠 깃을 그려갔다. 이 셔츠에 단추가 다섯 개 달렸는지 여섯 개 달렸는지가 다듬어진 귀한 나무판 하나를 새로 바꿔야 할 만큼 중요한 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유라는 깐깐한 공장 감독관처럼 고집을 부렸다. 어쨌든 유라는 쓱 보고 지나가지도 않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물을 끓여와선 옆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나무의 결에 섬세하게 새겨지는 인물은 제 머릿속에 있는 것과 조금 다른 구석이 있었으나, 오히려 그래서 더 그 애답다고. 옆에서 턱을 괴고 바라보다 제 몫의 잔을 홀짝인 유라가 생각했다.

 

 

 

"나쁘지 않네."

 

"솔직히 재능이 아깝지? 랜슬롯 터너, 19세기 말 전설로 남을 역작을 남길 수 있었을 텐데."

 

"서른다섯이 될 때까진 시간 많잖아?"

 

"왜 하필 서른다섯이야?"

 

 

 

싱겁게 째려보는 랜스의 눈초리를 무시하고, 투박한 캔버스를 제 쪽으로 가져와 들어 보였다. 그리곤 훅, 검은 가루들을 입바람으로 털어냈다. 색도 없고, 손가락으로 문지르면 경계선이 흐려지는 목탄화 속 빌리는 얕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어서 꼭 굳건한 얼굴의 청년이 아니라 잔잔한 아가씨들을 모사한 것 같았다. 그러나 사진을 찍는 것과 평소의 모습을 꺼내는 것 사이엔 딱 그만큼의 가식 없는 차이가 있겠지. 적어도 둘의 기억 속에선 그랬다. 찌뿌둥해진 허리를 쭉 펴고 함께 일어서며, 다시 한번 유라가 촛불 앞에 입김을 불었다.

 

 

 

 

 

 

 

크리스마스 날의 늦어진 저녁은 토끼 구이였다. 여왕은 백조를 먹고 그 밑의 사람들은 칠면조인지 오리인지를 구웠다 했다. 이런 기념적인 날이 오기 전까지도 사실 둘은 꽤 오래 고기를 먹지 못했는데, 돈보다는 기다란 귀를 늘어뜨린 축축하고 무거운 토끼를 어디를 어떻게 잘라내어야 할지에 대해 외면해온 탓이 컸다. 그러나 횃불이 일렁이던 여름밤은 지나고 벌써 창밖엔 흐린 싸락눈이 내려서 둘은 소금 간을 한 토끼를 구웠다. 오랜만에 석찬의 모습을 갖춘 식사를 마친 둘은 글 없는 카드를 주고받았다. 랜스는 유라가 그린 역 겹의 세월을 겪은듯한 얼굴의 청설모와 구불구불한 트리를 보고 키득 이지 않았다. 그저 그 옆에 붙인 전나무 잎과, 유라 라는 이름 뒤에 떨어진 잉크, 거기서 이어진 두꺼운 획으로 번져 급하게 쓰인듯한 터너 라는 단어를 오래 바라보았다. 붉은색 눈과 초록색이 한배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이웃이든 공장 동료든 아무도 믿는 사람은 없었지만, 어쨌든 그들은 터너 남매로 불렸다.

 

 

 

언젠가 유라는 랜스의 발에 들어맞을 신사용 구두를 상상했고, 랜스는 붉은 보석을 담은 브로치 같은 것을 선물하고 싶어 했으나, 두 가지 모두 유난히 빛이 도는 것들이어서인지 허름한 차림에는 도저히 실용이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크리스마스 크래커를 스스로 챙겨 넣고 스스로 잡아당기기도 웃긴 모양새니까. 대신 둘은 함께 고른 작은 상자에 리본까지 잘 매어 탁자에 올려놓은 뒤, 각자의 침대로 깊숙이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몰려오는 피곤함에 손목이 시큰거리고 몸은 천천히 풀어졌지만 잠이 오지 않아 베갯닢을 쥐었다. 그리곤 무언갈 기억하려 할 때처럼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러면 눈에 박아넣은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삶이 제 자리를 찾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제가 서있는 자리에 의문을 품을 일 같은 게 영영 없는 날이 올까. 스쳐 지나가는 장면들은 제 눈으로 바라본 것일 뿐이다. 그 풍경에 자신이 있는 것이 어울리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유난히 새빨간 것들이 풍경에 있기에 튄다는 생각이 들 때는 더 그랬다. 붉은 머리칼이 아무렇지 않았던 자리는 타오르는 횃불들과 휫날리는 깃발이 같은 방향으로 바람에 휘날릴 때 정도 였을까. 유라는 카드에 Turner 라는 이름을 쓰는 것이 유난히 망설여졌던 순간을 떠올렸다. 딱 이만큼. 서러운 날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다만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흘러가고 있는 순간에 서 있는 것을 문득 깨달을 때면, 그리고 한 번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지만, 이게 위로가 될 수 있음을 느낄 때면.

 

그 순간 시간대가 엉킨 추억을 더듬던 발길이 머뭇거려졌다. 사실 언제나 위로를 받으면 유라는 한참 머뭇댔다. 아직 누군가와 위로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거니와, 정말 이것이면 되느냔 물음이 끈질기게 베갯닢에 달라붙어 스멀스멀 귀와 코와 입을 타고 넘어오는 것 같았다. 제 안으로만 고이는 다정엔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열두 살의 날카로운 얼굴을 한 랜스, 아니 그의 동생이 제 얼굴을 집요히 응시하던 시선 앞에 서늘해진 얼마간의 침묵. 7년 동안 이대로면 좋겠다고 생각한 이기적인 밤을 모두 뒤덮는 차가운 온도. 돌려주지 못할 거라면 적어도 제가 남의 몫인 다정을 받아먹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살아가야 했다. 이런 새벽에 종종 그 시선이 아주 정확하게 떠오르는 건 당연했다. 이전엔 몰랐으나, 이제는 그 시선을 읽어낼 수 있었으니까.

 

제게도 그리워할 사람이 있었으므로.

 

 

 

 

 

길거리마다 축제의 잔열이 남은 아침이었다. 랜스와 유라는 습관대로 빛이 들기 직전 새벽녘에 잠시 눈을 떴다가 다시 잠들었다. 느지막이 일어난 둘은 여느 때보다 전날 저녁 덕에 호화로워진 아침 식사를 하고, 너무 여유를 부렸다며 공평한 타박을 부린 뒤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었다. 입에 사과 조각을 문 채 흰색 보닛과 발목까지 내려오는 허리가 잘록하게 묶인 치마를 옷장 안쪽에서 꺼내 들었다. 잠시 멈춰서는 그 하늘한 천을 만져보았다. 어차피 기사다운 검을 차고 부츠를 신지 못할 거라면 쓸모없는 허식이었다. 랜스의 다 입었냐는 물음에 문 쪽으로 어어, 하고 건성으로 말을 늘이며 옷장 깊숙이 옷을 집어넣었다.

 

 

 

바깥 날씨는 포근했다. 도심을 달리는 열차는 이른 시간대가 지나서인지 한적했고, 이 짧은 기차 여행에서 둘은 잠들지 않았다. 다만 크게 다른 듯 다르지 않은 풍경 속에서 가까워지는 캠든 타운의 모습을 바라보고, 손에 든 상자의 리본 색이 너무 요란한 것이 아닌가,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하나씩이라도 챙겼어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등의 대화를 했다. 결국 내려서 찻잎이든 과일이든 사기로 결론을 내고 둘은 잠시 말을 멈췄다. 성탄의 다음 날이라곤 느껴지지 않을 만큼 바쁜 도시 속을 스쳐 지나가는 그 시간은 평화로웠고, 또 사뭇 엄숙했다. 함처럼 작은 상자를 들고 조용히 고개 숙이고 있으면 부고를 듣고 참가하는 긴 장례행렬에 참가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 잠결에 밤새도록 길거리를 메운 캐롤의 탓도 있을 것이었다. 삶을 축복하는 거룩한 캐롤과 죽음을 위로하는 장엄한 장송곡은 거기서 거기 같았다. 그러나, 삶과 죽음으로 갈리지 않더라도 …… .

덜컥 랜스가 창문을 젖혔다. 생각에 골몰해있던 유라가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언젠가 제가 이렇게 창문을 열어젖히면 경쾌하게 웃던 그 다웠다. 훅 밀려 들어오는 찬바람을 맞자 약속한 언어처럼 유라가 입을 열고 소리내어 웃었다.

 

"무슨 생각 하고 있었어?"

 

"그냥. 색깔이 역시 좀 생뚱맞나 싶어서. 걔 취향 아닐걸."

 

"네 건 흰색이고, 내 건 붉은 색인데. 여기서 뭘 하든 생뚱맞을 걸."

 

"주권을 양도했단건 그런거지."

 

 

 

겨울바람에 뺨을 스치고서야 웃을 수 있었던 둘은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묘한 긴장감과 들뜬 마음이 뒤섞인 열차 칸. 옅은 하늘색의 새 손수건이 빌리의 얼굴 혹은 심장에 덮이는 장면과, 그의 손목에 매어주고 기사의 맹세를 나눈 뒤 쓴 술잔을 들이키는 장면만큼의 상상이 뒤섞인 그런 순간. 그럼에도 열린 창문 너머인지 새벽녘의 창문 너머인지, 객실의 뒤 칸인지 아니면 눈을 깜빡인 순간 스쳐 지나간 어느 순간인지, 이명처럼 자장가가 들렸다. 삶과 죽음으로 갈리지 않더라도, . 살아간다면 맞이할 매일의 밤에. 변주된 위로가 닿기를 바란다고.

 

유라는 그제야 창문을 닫았다. 킹스크로스 역에 열차가 정차하고 있었다